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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문자 문명과 매체
장 클로드 슈미트 등저 한국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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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특징을 대변하는 글은, 책의 후반부인 9장에 배치되긴 했으나, 로제 샤르티에(Roger Chartier)의 「책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은유, 현재의 불확실성」이다. 이 책을 접하는 독자에게 먼저 샤르티에의 이 글을 읽을 것을 권한다. ‘책’이라는 실체의 물질적 성격과 정신적 성격을 초기 근대의 세밀한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예시하고 있는 이 대학자의 글은 아마도 한국 서양학의 또 다른 증상인 ‘최신이론’과 ‘첨단 용어’ 숭배의 풍토 속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할 것이나, 문자의 정신뿐 아니라 ‘몸’에도 주목하는 인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 다른 프랑스 학자 장 클로드 슈미트(Jean-Claude Schmitt)의 「중세 유럽의 읽기, 쓰기, 노래하기」가 제1장에 등장하는 것도 매우 적절하다. 사실 앞에서 단테의 ?천국? 10곡을 떠올린 것도 슈미트의 이 글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샤르티에나 슈미트가 서술하는 역사는 ‘역사관’이니 ‘역사의식’이니 ‘역사의 변증법’이니 하는 가면을 쓴 권력의지의 통제로부터 자유롭다. 이들이 다루는 ‘문자’의 세미한 역사 속에서 비코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의 ‘진실’이 살아 숨 쉰다. 문자 생산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손’들이, 중세 수도원의 필사실(scriptorium)에서, 또는 인쇄소에서 부지런히 개입했던가! 그 노동은 마쓰다 다카미(Matsuda Takami)의 「중세 후기 필사본 여백에서 텍스트와 삽화의 상호작용」이 보여주듯, 얼마나 아름답고 뛰어난 영상들로 꽃피었던가! 문자가 노래로 변하는 악보의 역사는 또한 얼마나 경이로운가! 지식인들은 ‘인류의 진화’와 ‘역사의 진보’를 설교하고, 정치꾼들은 ‘진보’의 믿음을 확성기와 시위로 강요하지만, 나는 (슈미트가 소개하는) 레오넹(L?onin)과 페로탱(P?rotin)의 다성 음악을 들으며, 또한 (마쓰다가 소개하는) 정교하고 경건한 중세 필사본의 “서사적 머리글자(historiated initials)”에 감탄하며, ‘역사의 진보’라는 도깨비를 쫓아버린다. 다른 글들도 예외 없이 연구자들의 값진 노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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