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지사이자 시대를 앞선 사회운동가,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백촌 강상호의 삶을다시 살려 쓴 『형평운동의 선도자 백촌 강상호』백촌 강상호는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다. 1887년 경남 진주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백촌 강상호는 신식 학문을 익히고 젊은 시절부터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스물한 살의 젊은이였던 강상호는 ‘국채보상운동 경남회’를 결성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이 활동은 이후 그의 삶이 어떤 길로 나아가려는지 알 수 있는 지표와 같다.부친 강재순이 세운 민족 사학 사립 봉양학교(현 봉래초등학교)를 이어받아 20대 후반이었던 1915년부터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진주 지역 젊은이들을 규합해 독립을 외치다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남짓 복역한 후 가출옥했다. 복역 후에도 그는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며 경남도청 이전 반대운동, 진주사회운동가 간친회 사건으로 수차례 체포되고 석방되었으며, 진주신간회 창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 일제의 탄압에도 꿋꿋하게 뜻을 굽히지 않고 진주 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다.강상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백정의 신분을 철폐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해 1923년 형평사를 조직하고 형평운동에 매진한 것이다. 양반, 상놈의 법적인 차별은 사라졌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살아있었고, 특히 최하층 계급이었던 백정에 대한 멸시와 억압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양반 집안 청년들의 폭력에 백정 청년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만나 강상호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 본래의 양심”이라 소리 높여 외치고 백정들의 인권과 존엄을 위해 온갖 비난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평사를 설립해 차별 철폐에 온 힘을 쏟았다.이 책은 일제강점기 내내 지역에서 기개를 잃지 않고 독립과 평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사료 부족과 좌익으로 오해받고 불우하고 궁핍하게 삶을 마감한 탓에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와 조명을 받지 못한 강상호의 삶을 제대로 다시 살려냈다.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학사, 석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등학교 교사를 거쳐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서 30년간 교수로 일했으며, 경상대학교 교수회장, 국어사학회 회장, 배달말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번역하고 풀이한 훈민정음》, 《용비어천가(국문 가사 주해)》, 《국어교육 지역화의 실천방안》 등의 책을 지었으며, 국어사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썼다. 지금은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한글학회 정회원, 진주문화연구소 이사,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로 사소한 일을 거들며 지낸다.